오페라 작곡가 베르디(Verdi)의 경력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의 전체 이름은 주세페 프란체스코 베르디(Giuseppe F.Francesco Verdi)이다. 1813년 10월 10일 이탈리아 북부 작은 마을 론콜레에서 태어났으며 1901년 1월 27일 밀라노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베르디가 태어나고 활동하던 시기 유럽은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이탈리아는 통일을 이루지 못한 작은 군주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베르디가 태어난 북부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 보면 됩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베르디는 자신의 작품에 이탈리아의 독립으로 인한 자유의 쟁취 그리고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정치적 성향을 녹여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베르디의 집은 경제적인 여유가 되지 않아 베르디가 음악적 재능을 가진 것을 알고도 지원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알게 된 베르디 아버지의 친구인 바레치의 지원으로 음악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던 베르디는 입학 가능한 나이에 충분한 경력을 쌓지 못했던 그는 입학 가능 나이보다 4살이 많은 시기에 당시 최고 음악원이었던 '밀라노 음악원'에 응시하게 됩니다. 하지만 나이 제한으로 인해 그가 그토록 원했던 밀라노 음악원을 다닐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참 아이러니한 것은 이 '밀라노 음악원'이 시간이 흐른 후 '베르디 음악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현재도 최고의 음악원인 '밀라노 음악원'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수많은 음악가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베르디는 본인을 후원했던 바르치의 큰딸과 결혼해 아들과 딸을 낳고 고향에서 음악 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839년 그의 첫 오페라인 '산 보니파초의 백작, 오베르토' (Oberto, Conte di San Bonifacio)가 성공을 하게 되면서 밀라노로 이주하게 됩니다. 밀라노로 올라온 그는 인생 최악의 시기를 맞이하는데 두 번째 오페라인 '하루만의 임금님'(Un Giorno di Regno)가 처참하게 실패하고 3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사랑하는 아들과 딸 그리고 부인까지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실의에 빠진 베르디는 작곡 활동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은둔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높이 사고 있던 밀라노'라 스칼라'의 극장장이었던 '바르톨로 메렐리'의 격려와 요청으로 '나부코'(Nabucco)를 작곡하는데, 이 오페라로 그는 스타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나부코' 오페라의 설명은 아래에서 하겠습니다. 베르디는 이 오페라의 여주인공이었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를 만나게 되고 후에 그녀와 재혼하게 되며, 그녀가 죽을 때까지 함께합니다. 이후로도 그는 독립과 자유 그리고 통일 이탈리아를 꿈꾸게 하는 오페라 작품들을 꾸준히 남기며 이탈리아 최고 작곡가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또한 베르디의 큰 인기는 그를 통일 이탈리아의 국회의원 자리에 앉히기도 했습니다. 그의 둘째 부인인 스트레포니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사망한 후 베르디는 밀라노의 호텔에서 생활하다 1901년 1월 27일 오페라 '팔스타프'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베르디는 생전 26편의 오페라와 종교음악인 '레퀴엠' '테 테움'과 기악곡으로 '현악 4중주' 그리고 이탈리아 가곡, 피아노협주곡, 교향곡들을 작곡했습니다. 그의 오페라 중 몇 개의 작품을 아래에 소개하겠습니다.
작품들
'산 보니파초의 백작, 오베르토' (Oberto, Conte di San Bonifacio) 는 1839년 발표된 그의 첫 오페라로 그의 이름을 세상에 선보이는 계기를 맞게 해 줍니다. 그는 첫 오페라의 성공으로 고향에서 밀라노로 이주하며 본격적인 오페라 작곡 활동을 하게 됩니다. '하루만의 임금님'(Un Giorno di Regno)는 첫 오페라 성공 다음 해인 1840년 발표한 희극 오페라로 크게 실패하게 됩니다.. 이 시기와 맞물려 그의 아들, 딸 그리고 부인까지 잃게 되며 베르디는 최악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이후로 그는 희극 오페라를 쓰지 않다가 죽기 전 마지막 작품으로 희극 오페라를 쓰게 되는데 그 작품이 1893년에 발표된 '팔스타프'(Falstaff)입니다. '나부코' (Nabucco) 1842년에 발표된 오페라 나부코는 베르디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 주게 됩니다. 이 오페라가 이탈리아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주된 이유는 나부코 발표 당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고 말씀드렸는데, 오페라 '나부코'의 스토리가 성경의 사건으로 바벨론의 포악한 왕 나부코에게 고통당하는 히브리인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오페라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처지를 보게 되고, 독립과 자유의 정신을 되새기게 된 것입니다. 오페라 나부코는 베르디에게 다른 선물도 주는데 그것을 바로 그의 둘째 부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오페라의 주역 가수와 작곡가로 만난 두 사람은 평생을 함께하는 동반자가 됩니다. 이후에도 그는 '롬바르디아 인' (I Lombardi), '두 사람의 포스카리' (I Due Foscari), '잔 다르크' (Giovanna d'Arco), '레냐노의 전투' (La battaglia di Legnano), '시몬 보카네그라' (Simon Boccanegra) 등 독립정신을 고양하는 작품들을 발표하게 됩니다. 베르디는 대문호들의 작품을 오페라로 남기기도 했는데,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만든 오페라는 '맥베스' (Bacbeth), '오텔로' (Otello), '팔스타프'(Falstaff)가 있고 '빅토르 위고'의 작품으로 만든 오페라 '리골레토'(Rigoletto)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페라 '라 트라비아라' (La Traviata)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집필한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들인 '알렉상드르 뒤마 2세'의 작품을 대본으로 한 작품입니다.
유산
지금까지 수많은 베르디의 작품들을 극장에서 또 집에서 접해왔는데, 베르디의 생애와 그의 작품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며, 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베르디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내면을 끄집어내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며 그렇기 때문에 등장인물 상호 간의 대치와 대립 상황이 더욱 강하고 현실적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오텔로와 이야고의 내적 갈등, 고민, 질투, 사악한 마음 등의 표현은 마치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그리고 '라 트라비아타'에서 여주인공 '비올레타'의 사랑, 희생,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 죽음에 대한 아쉬움, 다시 살고 싶은 삶에 대한 강한 애착 등의 표현은 젊은 나이에 아들과 딸 그리고 사랑하는 부인까지 떠나보냈던, 그리고 오랜 시간을 주변의 좋지 못한 시선으로 인해 사랑하는 여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 결혼할 수 없었던, 고통을 겪은 베르디의 상처 난 가슴이 아니면 표현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나부코에 나오는 합창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그렇게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이탈리아에서는 비공식 국가가 된 것도 오페라 '나부코'를 작곡할 당시 베르디 본인이 억압자에게 지배당하는 피지배자의 입장이었고, 자유와 권리를 탄압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무치는 표현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르디가 사망한 지 이미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작품들은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관객들의 심장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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